이번 ‘종로문화페어링’에서는 한국 근대의 회화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전시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한국의 근대 회화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미술사에서 ‘근대’의 개념은 새로운 양식인 서양 미술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전개됐는가 하는 점에서 파악된다고 합니다. 한국 근대 회화의 시작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지만 보통 1900년대부터를 한국 근대 회화의 시작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1900년대 서구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시대적 변화와 일제강점기라는 사회적 분위기는 전통 회화의 근대성 확보에 크게 기여했으며, 동시대의 역동성을 압축해 한국 미술의 양식적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한국의 근대 회화는 우리 고유의 양식과 외래 양식이 공존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한국 근대 회화 작품을 두 전시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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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을 터치하다: 근대회화의 선구자, 고희동>은 종로구 원서동에 위치한 종로구립 고희동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전시입니다. 고희동미술관은 춘곡 고희동이 일본 유학 후 돌아와 1918년 직접 설계하고 41년간 거주한 곳으로 춘곡 고희동의 다양한 작품이 탄생한 곳이자 그와 당대의 예술가들이 활발히 교류한 공간입니다. 전통 한옥과 일본 가옥의 절충을 시도했으며 긴 복도와 유리문, 툇마루와 대청의 실내 공간화, 개량 화장실 등 근대 초기 한옥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 근대미술의 산실인 동시에 일제강점기 주거 모습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가옥’으로 인정받아 2004년 등록문화재 제84호로 등록됐으며 복원공사를 거쳐 2012년 11월 고희동미술관으로 개관했습니다.
<모던을 터치하다: 근대회화의 선구자, 고희동>에선 한국 근대미술의 새 시대를 연 근대회화의 선구자, 고희동의 화필 인생 50년을 살펴보고 다양한 동·서양화, 구립미술관이 새롭게 입수한 소장품 6점 등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시는 자료실, 제1~3전시실 그리고 사랑방과 화실로 구성돼 있습니다. 자료실에서는 고희동의 생애와 당시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살펴볼 수 있고, 제1전시실에선 직접 사용한 화구와 의자 다리를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04.13~1965.10.22)은 1886년 중국어 역관으로 근무하던 고영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14살이 되던 해, 역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관립한성법어학교에 입학해 미술 교사인 르미옹(Leopold Remion)을 만나며 처음으로 서양화를 접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벨기에인 드레와쥬(Deleoigue)의 통역 업무를 맡았으며 그 후 관직 추천을 받아 1904년, 광물의 생산과 기술교육을 담당하는 궁내부 광학국의 주사로 등용됐다고 합니다. 1909년엔 미술 연구를 위한 출장 명령을 받아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해 9월 동경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실기 위주의 교육과정으로 구성된 선과로 입학했습니다. 6년이 지난 1915년 31살의 나이에 선과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했고 당시 언론에선 그의 작품에 주목하며 최초의 서양화가가 탄생했음을 조명했다고 합니다. 귀국 후, 도화 교사로 활동하며 학생들에게 서양화 보급하고 표지, 삽화 제작을 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지만, 1920년대 후반 약 10년간의 활동 끝에 서양화가로서의 길을 접고 다시 동양화가로 전향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화단이니 미술 단체이니 하는 것은 이름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너무도 딱하게 생각하고 쓸쓸하게 여기었다.”
1918년 고희동은 자신을 포함한 서화가 13인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를 창립했고, 총무로 활동했습니다. 이후에도 조선미술협회의 초대 회장, 대한미술협회의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전람회를 개최하고, 동·서양화를 연구, 후진 양성을 시도하는 등 미술계의 발전과 제도 마련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춘곡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새로운 조형 방법을 후진에게 가르친 미술 교육자였으며 화단을 형성하고 이끌어 간 미술 행정가이자 미술 운동가였습니다.
제1전시실에서는 <천고수상>, <강산무진> 등 춘곡 고희동이 남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고희동은 송은 이병직, 소전 손재형 등 당대 여러 서화가와 함께 근대화단을 이끌고, 합작도를 그리며 친목을 다졌습니다. <계산무진>의 경우 고희동이 임인년(1962) 가을에 송은 이병직이 법안으로 그윽하게 즐기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려낸 작품이라고 합니다. 제2전시실에선 고희동의 자화상 3점과 서양화, 그의 자화상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보는 영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고희동은 <자매>, <가야금> 등 여러 서양화를 그렸지만 현재는 모두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의 현존하는 서양화는 단 세 점의 자화상뿐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통’과 ‘근대’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정자관을 쓴 자화상(복제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복제본)>, <부채를 든 자화상(복제본)>을 모두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세 자화상은 모두 동경미술학교의 졸업 작품을 위해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최종적으로 제출된 작품은 <정자관을 쓴 자화상>이라고 합니다. <정자관을 쓴 자화상>과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장을 통해 신분을 드러내는 동시에 민족적 자긍심을 표현했으며 특정한 동작이나 배경은 배제했다는 것인데요. 이는 보수적인 전통 사회의 덕목에 걸맞게 자신의 존재를 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두 자화상은 전통 화풍의 영향을 받아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부채를 든 자화상>은 앞의 두 자화상에 비해 파격적인데요. 가슴을 풀어헤치고 부채를 부치는 일상적인 모습이 잘 표현돼 있습니다. 이는 전통에서 근대로의 전환기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화가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모습과 양장본, 서양화로 꾸며진 배경은 당대 서양 문물을 접하고 받아들인 신지식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 이전 자화상 <정자관을 쓴 자화상>,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과 대비해 인물의 성격과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는 화가가 자신을 표현하는데 주체성과 자율성을 가지게 됐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화가의 자화상이 아닌 근대 회화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로 삼을 수 있으며 제작 연도가 1915년으로 우리나라 화가가 그린 가장 오래된 유화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제3전시실에서는 고희동의 동양화 작품을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그는 1920년대 후반, 귀국 후 약 10년 만에 서양화가로서의 삶을 지속하지 못하고 다시 동양화가로 전향했습니다. 당시에는 전통 회화가 주류였으며 서양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해 서화가에 대한 후원이나 작품의 매매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경제적 어려움과 화가로서의 입지마저 불안해졌고 동양화에 담긴 우리 고유의 정신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춘곡 고희동은 다시 동양화로 전향했습니다. 그는 동양화로 전향한 후 학생들에게 서양화를 가르치거나 체계적인 미술 단체를 창설하는 데에 더욱 몰입했습니다, 또한 서양화를 신파로 간주해 그 진화된 방법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동양화적 정신성에 서양화법을 가미한 새로운 형식의 회화를 창출하고자 했습니다.
이처럼 동양화를 그리면서도 서양화의 발전된 방법론을 수용하고자 한 고희동은 기존 전통 회화에서 볼 수 없었던 대상의 사실적 묘사, 서양화식 채색법 등이 가미된 새로운 형식의 회화, 즉 동서양을 절충한 형식의 회화를 선보였습니다. 그는 산수화를 가장 많이 그렸으며 그중에서도 금강산을 배경으로 한 실경산수화를 다수 남겼는데 이 작품들에서 두드러지는 절충 화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시의 마지막 구역에서는 고희동의 생애를 담은 영상도 시청할 수 있습니다. 5분 내외의 짧은 영상을 통해 그가 처음 미술을 접한 과정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를 창립하게 된 계기까지를 되짚어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편, 화실에서는 아트배지 및 아트수첩 만들기, 춘곡 모던-자화상 그리기와 같은 다양한 유·무료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전시를 관람한 후 춘곡 고희동이 여러 작품을 탄생시켰던 곳에서 개성이 담긴 기념품을 만들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모던을 터치하다: 근대회화의 선구자, 고희동>
<화필인생: 박노수의 모던 타임즈>는 종로구 옥인동에 자리한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에서 진행되는 전시입니다. 박노수미술관은 1937년 조선 후기 관료이자 친일파인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해 지은 집으로 몇 번의 소유주가 바뀐 후 1973년 남정 박노수가 이 가옥을 매입해 2011년까지, 약 40년간을 거주했습니다. 박노수미술관은 주로 한식으로 지어졌지만, 곳곳에서 서양식 구조를 찾아볼 수 있는 절충식 기법의 가옥입니다. 1층은 온돌식으로 온돌과 마루를 사용했고, 2층은 서양식으로 마루방 구조를 사용했으며, 가옥 곳곳에는 3개의 벽난로가 설치돼 있습니다. 또 현관은 벽돌로 지어져 있으며,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박공지붕으로 돼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줍니다. 1991년엔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등록됐으며 2011년 남정 박노수가 사회 환원에 뜻을 가지고 종로구와 기증 협약을 맺은 후 2013년 9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개관했습니다. 현재까지도 남정 박노수의 40년 삶과 작품세계가 정원과 함께 주택 곳곳에 담겨 있으며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공간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 관리돼 있습니다.
<화필인생: 박노수의 모던 타임즈>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개관 10주년을 맞이해 진행되는 전시로 종로구와 종로문화재단의 비전 ‘종로 모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동양화의 현대성을 모색해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던 전시를 통해 박노수의 1970~1980년대 작품을 만나고, 모던을 표상하는 인사동 아뜰리에의 사회·문화적 배경과 관련된 자료들을 보며 당시 시대상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한국 화단의 거장, 박노수(1927.2.17 ~ 2013.2.25)는 1927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후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국무총리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고, 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을 수훈했습니다.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국전 초대 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했고, 1983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정됐습니다. 그는 동양화의 현대성을 모색하며 채색을 연구했고, 1980년대, 그의 대표 색상인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군청색’인 ‘푸른 쪽빛’을 발견했습니다. 이후에도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며 추상적인 형상을 그리거나 화사하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했고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해 낸 작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층 전시실은 ‘푸른 쪽빛’이 잘 드러난 1980년대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중 박노수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 중 하나인 <류하>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요. 수하인물도 형식의 산수풍경화인 <류하>는 앞서 말한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군청’ 즉 ‘푸른 쪽빛’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눈이 시리도록 ‘푸른 쪽빛’의 버드나무가 공간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강렬하면서도 부드러운 터치로 선염(동양화에서 화면에 물을 칠해 마르기 전에 붓을 대어 몽롱하고 침중한 묘미를 나타내는 기법)된 버드나무 아래에는 한 사람이 서 있고, 곳곳에는 여백이 존재하는데 이 여백은 푸른 버드나무와 대조돼 보는 사람에게 더 깊은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1980년 중반에 이르러 박노수는 강렬한 원색과 더불어 중간색을 연하게 선염해 사용했고, 그의 작품은 한층 더 부드러운 분위기를 가지게 됐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그려진 그의 작품 <고사>를 보시면 <류하>를 포함한 이전 작품과는 다르게 화려하지만 그윽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2층에서는 1970년대의 작품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박노수는 당시 화단에서 대세로 군림한 양식과 형식을 따르지 않고 먹과 색을 혼용하고 여백을 활용해 간결하면서도 산뜻·선명한 작품을 그려냈습니다. 1970년대 초기 작품에서는 먹이 가미된 짙은 군청색을 사용했고 1972년 여름부터 점차 먹을 덜어낸 독특한 군청을 고안했는데요. <포서도>를 보면 이 시기의 군청은 아직은 먹이 가미된 짙은 군청색으로 ‘프러시안블루’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박노수는 점차 먹을 덜어내며 명도와 채도가 높아진 독특한 군청색을 고안했고, 그의 군청은 ‘프로시안블루’에서 ‘코발트블루’에 가깝게 변화했습니다. 이러한 군청은 노랑, 주홍 등 화려한 원색과 대조를 이루며 더욱 빛을 발합니다. 이 시기의 군청을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은 1979년 그려진 <강>으로 1972년 그려진 <포서도>의 군청과 비교했을 때 밝고 산뜻해진 군청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군청’에 대한 박노수의 시도는 지속됐으며 1980년대 그의 상징과 같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군청’을 발현했습니다.
그의 회화는 수묵과 채색의 지속되는 대립에 무한한 창작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명도와 채도가 높아진 그의 작품은 수묵이 지배적이었던 전통 화단에 신선한 조형성을 선사했고, ‘채색=왜색’이라는 당시 인식으로 인해 해방 이전부터 갈등을 빚어 온 수묵과 채색의 대립에 색을 부여하는 무한한 창작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전시실의 한편에서는 근대 화실과 화숙, 그리고 당시 아뜰리에(작업실) 문화에 대한 자료도 확인해 볼 수 있었습니다. 화숙은 화가들이 서화를 창작하며 제자를 양성하는 화실이자 교육 기관으로 서화를 감상하고 토론하며 작품을 수집할 수 있는 화랑의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대부분의 동양화가들이 이러한 화숙을 열었고 대표적인 예가 종로구 당주동에 위치한 안중식의 ‘경묵당’입니다. 경묵당의 제자로는 이도영, 고희동, 이상범 등이 있으며 안중식의 제자 이상범이 종로구 누하동에 만든 ‘청전화숙’에서 박노수는 약 1년간 그림을 배웠다고 합니다.
박노수의 호는 ‘심영실’, ‘현동화루’, ‘월아장’, ‘간원’이 있는데요. 각 호는 그가 화실에 붙인 당호로 네 개의 화실 모두 종로에 위치해 있으며 그중 인사동에 자리한 ‘현동화루’는 1970년대 인사동에 형성된 아뜰리에 중 하나였습니다. 박노수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주거 공간과 분리해 도심 한복판인 인사동에 작업 공간인 아뜰리에를 마련했습니다. 기존의 인사동은 주로 근대 이전 제작된 골동품과 고서화를 판매했는데요. 그러던 중 1970년대 초반 인사동에 중견 화가들의 작업 공간이 형성되고 현대화랑이 개관하며 골동품 상점으로 즐비했던 이전과 달리 동시대 미술품을 전시하는 거리로 변화했습니다. 화랑 거리로서 유리한 조건을 가지게 된 인사동 주변에는 많은 화가들의 화실이 집결됐고, 점차 동양화가뿐만 아니라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는 화가들 역시 인사동에 자리를 잡아 자신들의 아뜰리에를 마련했습니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직접 체험이 가능한 미디어 아트존이 마련돼 있는데요. 박노수미술관 소장품 중 일부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인 바위, 나무, 산 등의 요소 그리고 박노수미술관 개관 10주년 관련 단어를 조합해 직접 작품을 재구성해 볼 수 있습니다. 박노수의 작품을 이용한 패턴을 만들어 그의 집을 ‘색’으로 물들이며 그의 작품을 더 가깝게 볼 수 있습니다.
<화필인생: 박노수의 모던 타임즈>
- 전시 기간: 2023.05.27 ~ 2024.03.31. . .
선구적 화업의 길을 걸어왔고, 미술계의 발전을 이끌어낸 ‘춘곡 고희동’, 전통 속에서 현대성을 구현하며 새로운 화풍을 개척해낸 ‘남정 박노수’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그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두 전시를 소개해 드렸는데요. 소개해 드린 작품 외에도 모던-회화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작품을 만나볼 수 있어요, 미술관에 방문해 근대 가옥의 특징을 살펴보고, 전시를 통해 시대를 앞선 화가들의 작품을 관람하며 한국 근대미술의 태동과 발전에 대해 알아보시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