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과 도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무대이자 시대와 사회의 흔적을 가장 솔직하게 담고 있는 공간입니다.
그 흔적을 읽는 순간, 우리는 사라진 어제와 오늘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깨닫게 되죠.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종로문화재단은 정림건축문화재단과 업무협약을 맺고 긴 세월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종로 곳곳을 탐방하는 〈종로건축×인문학교〉를 열었습니다. 1기에서는 청년들, 2기에서는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 3기에서는 중고등학생들 총 36명이 참여해종로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세대마다 다른 시선으로 도시를 관찰하고, 그들의 언어로 종로의 시간을 읽어냈는데요. 〈종로건축×인문학교〉를 총괄한 프로젝트 매니저 권시원 담당자와 2, 3기 활동을 이끈 정유상 강사와 뒷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삶의 태도와 철학을 결정하는 '건축'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해요.
권시원 건축을 전공한 후 10년 넘게 건축과 도시 기반의 융합교육을 기획하고 가르쳐 왔습니다. 그때마다 건축이 생각의 폭을 넓히고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시키는 강력한 교육 매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정림건축문화재단과 협업하며 도시와 건축을 연결시키는 교육의 필요성을 더 깊이 느꼈고 이번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정유상 저는 무궁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로서 기획∙설계∙연구를 담당하고 있고 최근에는 건축교육 분야에서 기관 및 문화재단과 협력해 다양한 수업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정림건축문화재단의 교육사업 '건축학교'에 참여하면서 건축의 생애 주기를 주제로 건축이 단순히 건물이 지어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처럼 태어나고 채워지고 사라지는 과정이 있다는 점을 알리고 있는데요. 이번 프로젝트에서 그러한 건축과 도시의 가치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Q. 〈종로건축×인문학교〉는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나요? 기획 단계에서 가장 중점에 둔 부분이 궁금합니다.
권시원 건축은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삶을 담는 그릇이자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태도와 철학을 나타내는 언어라고 생각해요. 건축교육을 하면서 느낀 것은 사람들이 도시를 너무 빠르게, 그저 소비하듯 지나쳐 버린다는 점이었어요. 특히 사진이나 영상 같은 시각 정보가 일상의 중심이 되면서 건축 역시 보이는 모습에만 집중하고 도시가 가진 시간과 기억, 일상의 의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죠. 종로는 600년 도시 서울의 중심에 있는 종로의 유구한 역사를 품고 있고 노후 주거지와 현대적 상업공간이 공존합니다. 세대가 다른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종로의 사람과 시간, 그리고 장소가 맺는 관계의 층위를 풀어낼 때 청소년들은 살아 있는 인문학을 경험할 수 있어요.
정유상 핵심 문제의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복합적인 도시의 층위를 어떻게 이해하게 할 것인가'였어요. 종로는 해체·보존·재생 같은 첨예한 논쟁이 실제 공간에 그대로 드러나는 도시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직접 그 변화의 맥락을 읽어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표현할 수 있다'라는 말은 건축교육에서 특히 중요한데요. 강의-탐방-제작의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도시를 해석하는 세대별 감각
Q. 〈종로건축×인문학교〉은 1기 20대 초반 청소년, 2기 초등학교 4~6학년생, 3기 중고등학생으로 구분해
세대별로 프로그램을 다르게 구성했습니다. 그 이유와 각 프로그램별로 중점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권시원 세대에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이해하는 역량과 감각이 연결될 때 종로를 훨씬 더 입체적으로 읽을 거라 생각했어요. 1기 청년층은 사고의 폭이 넓고 이미 도시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이 분명합니다. 이들에게는 기록과 관찰을 통해 도시의 이면을 분석적으로 들여다보고 자신만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2기 초등학교 고학년은 세상을 몸으로 경험하는 단계예요. 걷고 만지고 사진을 찍으며 도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죠. 어렵게 설명하기보단 '왜 이렇게 생겼을까?', '이곳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처럼 질문 중심의 활동으로 구성했어요. 3기 중고등학생들은 관찰과 표현 능력이 급격히 성장하는 시기입니다.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이야기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뛰어나죠. 그래서 사진이나 영상으로 스토리텔링 하는 창작 중심 프로그램으로 구성했습니다.
정유상 2기와 3기는 활동의 큰 틀은 동일하지만 그 내용과 제작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어요. 우선 강의에서는 도시를 해석하는 네 가지 관점(경제·환경·기능·사회문화)을 배우며 도시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관점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실제로 어떤 장면을 봤는냐에 따라 도시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 부분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후 이뤄지는 탐방에서는 강의에서 배운 관점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직접 확인하며 도시의 어떤 장면에 더 눈길이 가는지를 스스로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이를 바탕으로 콘텐츠를 제작하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나는 왜 이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을까', '내가 본 도시를 배운 관점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와 같은 탐방에서 느낀 질문을 제작물로 표현하게 했습니다. 이때 연령별로 익숙한 표현 방식을 고려했는데요. 2기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의 경우 '어린이 건축기자단'이라는 이름으로 글, 카드뉴스를 제작해 자신의 생각을 구조화해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고 3기 중고등학생들의 경우 영상 제작에 익숙한 세대인 만큼 숏폼 영상을 활용해 스스로의 시선을 기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Q. 종로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많이 갖고 있는 도시이기도 한데요. 탐방 장소를 고른 기준과 고민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권시원 도시의 문제를 단순히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문제를 설명하기보다 스스로 질문하게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고 이 부분을 주강사님들이 잘 풀어 주셨습니다. 가령 노후 공간을 보면서 이 공간을 지켜야 할지, 아니면 변화해야 할지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했고 젠트리피케이션을 설명할 때는 누구에 의한 변화인지, 이 변화를 통해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밀려나는지 같은 질문을 통해 스스로의 관점을 고민하고 판단해 보도록 했어요.
정유상 2기는 세운상가와 함께 과거와 현재가가 공존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탐방했습니다. 세운상가는 지금도 해체와 보존을 두고 논쟁이 활발한 곳이고 도시의 층위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표적인 장소라 고르게 됐어요. 3기의 경우 아파트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만 생활하는 친구들이 많은 만큼 다른 주거 환경을 경험할 수 있도록 경사지 주거지와 창신동 도시재생 지구를 선택했습니다. 여러 문제들 가운데서도 빈집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통해 도시 문제를 건축적으로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봤고 창신동이 도시재생을 통해 다시 협력을 찾아가는 과정을 직접 체감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Q. 탐방 과정에서 학생들이 가장 관심을 두고 본 종로의 장면은 무엇인가요?
권시원 도시 곳곳의 옛 흔적을 바라보는 시선이 기수마다 완전히 달랐는데요. 초등학생들은 오래된 간판이나 흔한 옛 물건을 보며 '오래돼서 멋있다', '이 집에는 누가 살았을까'와 같은 순수한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접근하는 반면, 중고등학생들은 '옛 흔적의 의미는 무엇일까', '재개발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처럼 사회구조적·정책적 문제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아가 '이 문제를 어떻게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도 했죠. 청년층은 젠트리피케이션, 도시재생 과정의 이해관계까지 한층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눴어요. 같은 공간을 봤음에도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세대별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정유상 시간이 켜켜이 쌓인 도시의 매력 뒤에 사람들이 실제로 겪는 불편과 위험 요소가 공존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오래된 골목과 건축물은 이야기가 많지만 직접 걸어보면 보행이 어려운 구간도 많고 방치된 빈집이나 정비가 필요한 공간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학생들은 이런 문제를 단순히 '낡았기 때문에 새로 지어야 한다'라고 접근하지 않고 공간이 지닌 이야기와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이 고민은 '사람들이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왜 필요할까'와 같은 질문으로도 이어졌죠.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건축과 도시가 사람과 깊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Q. 제작 과정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무엇인가요?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권시원 1기 청년층은 2·3기와 달리 정해진 형식 없이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탐방을 하면서 무엇을 만들지 스스로 구상하고 탐방을 마치자마자 필요한 재료를 직접 요청해 바로 제작에 들어갔죠. 탐방 단계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쉽게 드러내지 않던 학생들도 작품에서는 메시지가 놀라울 만큼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어떤 학생은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 종로의 흔적을 점토로 형상화했고, 또 다른 학생은 조명을 활용해 소멸 직전의 공간을 그림자로 표현했습니다. 80년대 간판 글씨체를 수집해 콜라주 작품으로 재구성하며 사라져 가는 풍경을 기록한 경우도 있었어요. 건축이나 도시 정책에 관심이 많은 청년들이 많이 참여한 만큼 이들의 시선과 문제의식이 작품 속에서 오롯이 드러났고 이를 통해 매우 깊이 있는 의견과 해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정유상 도시의 요소들은 단순한 구조물을 넘어 각각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데 학생들이 이를 직접 찾길 바랐습니다. 4명씩 한 조가 돼 내가 마주한 인상적인 사진을 찍은 뒤 그중에 12장만 뽑아 소개하도록 했는데요. 대부분의 학생들이 200장 이상을 찍어왔고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았음에도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장소나 오래된 질감, 변화의 차지가 드러난 장면을 스스로 골라냈습니다. 오랜 시간 여러 층위가 쌓인 종로를 자기만의 속도로 이해해 가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또 사진을 찍으면서 흔적을 남긴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종로 곳곳을 몸으로 직접 익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권시원 안전 문제였습니다. 날씨 변수도 있었지만 익선동처럼 주말에 인파가 급격히 몰리는 공간에서는 이동 동선과 관찰 포인트를 사전에 세밀하게 다시 점검해야 했죠. 예상보다 사람이 많아서 설명하기도 어렵고 학생들이 흩어질 위험도 있기 때문에 경로를 탄력적으로 조정하고 대기 공간을 확보하는 등 안전을 최우선으로 운영해야 했습니다. 변수가 많다 보니 매 탐방마다 사전 답사와 시뮬레이션이 철저히 진행했습니다. 다행히 참여 학생의 학부모님 중 한 분이 익선동에서 주얼리 가게를 하고 계셨고 쉼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흔쾌히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프로그램의 밀도를 높이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공간 속에 숨은 사람의 이야기
Q. 종로 건축, 도시의 매력, 종로가 가진 교육적 장점은 무엇인가요?
권시원 종로는 옛 것과 새로운 것이 한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도시로 그 대비가 만들어 내는 도시적 풍경 자체가 정체성이 되는 곳입니다. 글로만 보면 어렵지만 도시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나온 시간과 생활의 맥락, 사회적 역할을 하나의 체계로 이해할 수 있죠. 이를 직접 보고 느끼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지금 내가 살아가는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되짚어보고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최고의 교육적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유상 하나의 공간 안에 시공간적 층위가 풍부하게 쌓여있다는 점입니다. 아파트 중심인 신도시는 그런 도시의 이야기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종로, 그중에서도 세운상가, 익선동, 옥인동, 창신동은 경제적·환경적·사회문화적 맥락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건 곧 이야기가 많은 도시라는 뜻이자 교육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재료가 풍부하다는 의미입니다. 과거의 이슈와 지역의 역할, 변화가 뚜렷하게 보이는 종로는 청소년이 한 명의 도시 구성원으로서 공간을 바라볼 힘을 키우는 데 너무 적합한 장소이자 훌륭한 인문학적 학습의 현장입니다.
Q. 도시적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 청소년 시기에 건축 문해력이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시나요?
권시원 몇 해 전 청소년들과 구 공간사옥을 탐방한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백지 상태에서 공간을 보고 느끼도록 하고 싶어 사전 정보는 최소화했는데요. 한 시간가량 관찰하며 돌아본 한 학생이 제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건축은 어디 있어요?". 저는 이 질문이 건축 교육의 가장 본질적인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건축이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구조물 혹은 특정한 형태로만 정의되어 있었던 거죠. 이 경험은 저에게 다시 질문하게 했습니다. '모두에게 건축은 무엇인가', '공간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건축을 읽는 힘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이것이 바로 건축 문해력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청소년기는 정체성이 정립되고 세계관이 확장돼 가는 시기입니다. 도시와 건축이 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 사회의 역사적 맥락, 환경과 경제적 연관까지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다면 세상을 해석하고 자신의 관점을 세우는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정유상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 그리고 그 그릇이 모인 것이 도시이며 도시가 건강해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공교육의 목적이 건강한 사회 구성원을 길러내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 과정 중의 하나인 내가 사는 이 도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배울 기회는 거의 없죠. 건축 문해력은 공간을 읽고 스스로 질문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줍니다. 나 스스로 한 명의 주체가 돼 도시를 바라보고 생각하는 경험을 통해 더 나은 도시의 미래를 상상하는 시민으로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도시건축 교육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가장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요?
행정적 기반과 전문성이 균형 있게 결합되고 그것이 꾸준히 이어져야 합니다. 학교 교육으로 이뤄지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문제들이 있기에 지역의 문화사업을 이끌어 가는 공공기관과 도시와 건축 분야에 전문성을 지닌 기관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프로그램이 더욱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기관이 협력해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갖고 청소년들이 실제로 체험하며 배우는 현장 중심 교육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정유상 어른들이 '아이들이 도시를 접촉할 수 있는 장(판)'을 꾸준히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할 기회만 있다면 있다면 청소년들은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도시를 읽고 상상하고 의견을 나누고 참여하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속 가능한 도시건축 교육의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종로건축×인문학교〉 역시 꾸준히 이어져 아이들이 도시를 만나는 장을 더욱 넓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길 기대합니다.
